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병합 (문단 편집) == 발단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독일인들이 집중되었던 오스트리아 일부에서는 방대한 영토, 특히 상공업이 발달한 [[보헤미아 왕국]]([[체코]], 즉 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잃어 나타난 '''경제적 곤란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과 전통적인 통일 독일 관념이 결합해 다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관념이 나타났다.[* 이는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을 암시하는 조문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2조(영토) 국토는 독일 각 주(州)의 영토로써 성립한다. __[[오스트리아|만일 다른 지역의 인민]]으로서 그 자결권에 의하여 병합을 원할 때에는 국가법률에 의하여 이를 국가에 편입할 수 있다.__] 하지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단일한 국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였고 [[1919년]]의 [[생제르맹 조약]]과 [[1922년]]의 제네바 의정서로 독-오 합병은 20년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계는 기독교 사회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라는 2대 정당이 차지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기사당 출신 [[수상]]인 쇼버가 독일과의 [[관세동맹]]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독일의 동의 및 '''독일과의 통일을 향하는 첫걸음으로 인식한 국내의 통일된 지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포기했으며 "저자세 외교"라고 비판한 사민당과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기사당과의 알력은 [[나치당]]의 대두를 허락했다. 그렇게 등장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2년]]의 지방선거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우익 집단인 호국단의 쿠데타 실패로 기존의 보수층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는데 [[1933년]]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를 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테러]] 행위가 빈발했다. 이에 대응하여 기사당 출신의 수상인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독일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외교적 후원과 호국단과의 연합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를 실시하여 사민당과 나치당을 해산했다. [[1934년]] 돌푸스가 수상관저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하고 나치당의 쿠데타가 일어났다가 후임 총리가 된 기사당의 [[쿠르트 슈슈니크]] 장관이 이를 진압하면서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독일과의 통일 논의가 급락했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4개 사단을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선에 전개시켜서 독일의 행동을 견제했고 나아가 히틀러를 매도했다.[* 당시 돌푸스와 그의 가족들은 무솔리니의 초청을 받아서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가족들이 먼저 이탈리아로 출발했는데 돌푸스가 암살당하자 무솔리니는 자신이 초대한 가족들에게 가장의 부고를 알리면서 비탄에 빠진 돌푸스의 유족들을 보아야만 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1935년]]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이 국제적 지위를 개선했고 다시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를 히틀러가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다시 개선되었다. 또한 1936년에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면과 정치 활동의 재개를 보장받았다.[* 이는 1938년에 무솔리니가 슈슈니크를 방관하는 계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